1993년 11월 12일, 서울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단순한 마트 개장이 아닌, 이는 당시 백화점 업계의 후순위로 밀려난 신세계 그룹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전략적 승부수였습니다. 삼성과의 지분 정리로 독립하게 된 신세계는 더 이상 그룹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백화점 시장에서는 롯데와 현대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의 한계를 넘기 위한 전략적 도전
1980~9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의 유통 시장은 백화점과 전통시장 중심이었습니다. 백화점은 중산층 이상의 소비자만을 타겟으로 했고, 전통시장은 낙후된 환경으로 불편이 많았습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월마트, 프라이스 클럽 등 창고형 할인점이 인기를 끌고 있었고,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은 이를 눈여겨보며 한국 시장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됩니다.
이마트 창동점의 혁신적 운영 모델
이마트 창동점은 기존 유통 방식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중간 유통 단계를 제거하고 제조업체와 직접 거래하여 상시 저가 정책을 실현했습니다. 인테리어를 간소화한 창고형 구조, 최소 인력 운영, 마케팅 비용 절감 등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 구조를 구현했습니다. 단 27명의 직원으로 운영되는 1,500평 규모의 매장은 운영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픈 당일 약 26,800명의 고객이 방문했고, 첫날 매출은 무려 1억 800만 원에 달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마트’라는 개념이 생소했지만, 품질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대량 구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프라이스 클럽 도입과 유통시장 개방 대응
신세계는 이마트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미국의 프라이스 클럽과 손잡고 회원제 창고형 할인점을 국내에 도입합니다. 이는 단지 해외 기술 제휴가 아니라, 다가오는 WTO 유통시장 전면 개방에 대비한 신세계의 장기 전략이었습니다.
1994년 양평에 문을 연 프라이스 클럽 1호점은 국내 최초로 무빙워크를 설치해 대형 카트를 들고 층간 이동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연회비를 받고 운영되는 회원제 구조를 도입했습니다. 이 점포는 단 100일 만에 회원 수 7만 명을 돌파하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마트와 함께 신세계 유통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국내 유통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이마트와 프라이스 클럽의 성공은 국내 유통 산업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백화점과 슈퍼마켓 중심이었던 유통 구조는 대형 할인마트라는 새로운 업태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이는 이후 등장한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의 출현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마트의 상시 저가 전략은 제조업체들에도 새로운 납품 관행을 요구했고, 유통업계 전반에 걸친 가격 투명성 확보와 경쟁력 강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온라인 쇼핑과 비교해도 여전히 경쟁력을 갖춘 오프라인 유통 모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