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소련의 교회 탄압과 전체주의의 탄생: 자유가 사라진 시대의 교훈

by 갈매기인포스터 (Seagull Infoster) 2025. 5. 28.

자유를 외치던 소비에트, 어떻게 전체주의가 되었는가?

20세기 초,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제국주의 짜르 체제에 반발하며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자치 조직인 '소비에트'를 결성했습니다. 이는 본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자치적 조직이었으나, 레닌과 볼셰비키의 등장은 이러한 이상을 급격히 변질시켰습니다.

 

볼셰비키는 '우리만이 약자의 편이다'라는 선전 전략으로 타 정당과의 연대를 거부했고,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사법 절차를 무시한 정치경찰 ‘체카(Cheka)’를 활용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숙청했습니다.

종교는 왜 탄압당했는가?

레닌과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명제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구호를 적극적으로 실현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 그리고 천국이라는 희망을 강조함으로써 혁명에 방해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체계적인 탄압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토지와 재산은 몰수되었고, 자선 활동조차 금지되었습니다. 심지어 ‘무신론’이라는 신문을 통해 교회는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 비과학적 진실의 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전은 어린이들까지 반기독교 활동에 참여시키는 등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침묵과 동조 속에서 탄생한 전체주의

초기에는 많은 농민들이 혁명의 혜택을 받았기에, 교회 탄압과 숙청에 침묵하거나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교회 탄압이 끝나자 그 다음은 부유한 농민이, 그 다음은 일반 농민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집단농장이 강제로 시행되었고, 농민들은 자신이 생산한 곡식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항하거나 잉여 생산물을 감추다 적발되면, 당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기근과 자유의 상실

레닌 치하에서 발생한 대기근(약 520만 명 사망)과 스탈린의 대숙청(약 2천만 명 사망)은 자유가 억압된 사회의 비극적인 결과였습니다. 교회는 희생양이 되었고, 인민은 자유 없이 권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937년까지 소련 내 교회의 수는 58% 이상 감소했고, 종교 단체는 정부의 허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 진실이 통제될 때, 자유는 소멸된다.
  • 독재는 대중의 동의와 침묵 속에서 자란다.
  • 타인의 자유가 억압받을 때 방관하면, 결국 그 탄압은 나에게 돌아온다.

미국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자는 그 자신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이 글은 소련의 역사에서 나타난 종교 탄압과 자유의 상실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작성되었습니다.